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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下전쟁―제2땅굴을 이렇게 찾았다! (2) : 보이지 않는 敵과의 머리 싸움



등록일   |   2015. 04. 03
地下전쟁―제2땅굴을 이렇게 찾았다! (2) : 보이지 않는 敵과의 머리 싸움
1973년 말 제6사단 지역으로 땅굴을 파 내려왔다는 것은, 그 전 해의 역사적인 7·4남북공동성명과 대조해 보면 북한의 남북대화와 평화에 대한 진심을 알 수 있다.

柳炳賢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아래 내용은 《한미연합사 창설의 主役-유병현 회고록》 中 ‘땅굴 탐색 작전’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제6사단의 끈기

땅굴을 파고 있는 인민군의 어려움은 나의 경험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그에 비하여 지상에서 그 땅굴 공사 소리를 탐지하고 있는 우리 장병은 창군 이래 처음인 특수 작전이라 끈기와 참을성이 강해야 했다. 땅속에서 공사하고 있는 인민군은 작업의 가혹성을 잊고 오로지 ‘김일성 수령님과 당에 대한 충성심’만을 내세워 작업을 진행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분명 연중무휴로 돌관(突貫)작업을 하면서 공사를 촉진하고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시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를 완전히 포위하면서도 끝내 점령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소련의 동굴작전 때문이었다. 시가전(市街戰)에 돌입하자 소련군이 지하 배수로를 동굴로 연결해 독일군의 후방을 교란하였기 때문이다.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 통치를 종식시킨 마지막 단계에서 벌어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월맹군이 프랑스군을 격파한 것은 끈기 있게 여러 땅굴을 프랑스군의 방어진지 안으로 파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나는 베트남전에서 맹호사단을 지휘할 때 베트콩들의 땅굴 소탕작전을 한 경험이 있다. 동물이나 인간도 지하 땅굴로 숨어들 때는 출입구가 있어야 하고 모름지기 지상에 그 흔적을 남긴다. 사냥꾼이 그 흔적을 찾아내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맹호도 쫓던 적이 땅굴로 숨어들면 반드시 지상에 남겨 놓았을 흔적을 조심스럽게 샅샅이 수색했다. 그리하여 의심지역이 발견되면 서둘 것 없이 자리를 깔고 앉아 지하의 적이 지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지칠 때를 기다려 투항을 권고하면 쉽게 포로, 귀순자를 얻을 수 있었고 손쉽게 소탕작전을 전개하여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제6사단의 땅굴작전도 비무장지대 북쪽으로 넘어가서 그 입구를 제압하면 끝이 나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김일성은 6·25 패전의 중대 이유 중 하나가 제공권(制空權)의 완전한 상실이라고 믿었다. 그 약점을 제거하는 방책으로 현존 전력과 전쟁수행 역량을 지하에 보존하기로 하고 全 국토의 지하요새화 정책을 세웠다. 북한은 그러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강행하여 지하요새화 기술과 땅굴 굴착기술이 발달되어 있었다. 그렇게 두더지병에 걸린 김일성이, 자신의 기습 공격 기본 전략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비무장지대에 땅굴을 파라고 지시하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였다.

김일성의 근무시설과 거주지역은 세계에서 유례없을 정도로 지하 방어시설에 완전히 수용되고 있다. 김일성의 ‘全 국토의 요새화’와 ‘全 인민의 무장화’는 북한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 지하화 공사의 명수(名手)가 이번에는 드디어 비무장지대를 지하로 넘어 오려고 기도했다. 휴전협정을 완전히 위반하고 유엔과 공동으로 관리해야 할 비무장지대에 지하갱도를 파 내려올 흉계는 김일성이 직접 지시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 아군이 이러한 위협에 당면하기는 처음이었다. “지하에서 소리가 들린다”며 그들의 흉계를 만천하에 알린다고 해서 곧 우리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逆선전의 자료를 제공할 뿐이다. 나는 그 땅굴을 반드시 찾아내고 파내야 한다는 것을 재삼 사단과 담당 경계부대에 숙지시켰다. 담당 방어지역에서 적의 흉계를 알아낸 공(功)은 인정되지만 땅속에서 그 땅굴을 찾아내고 파내는 작전은 한 개의 야전 전투공병대대만 보유한 사단의 능력을 초과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해야 했다.

군단장인 나는 그 작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공병여단 등으로 모든 지원을 제공한다고 방침을 정했으나 상황의 전개 여하에 따라서는 야전군이나 육군에 지원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그러하니 사단은 우선 내가 지시한 작전지역의 철저한 경계와 작전 완료 때까지 발생할지 모르는 여러 우발사태에 대응할 태세를 갖추어 놓되 공(功)을 서둘거나 과욕을 부리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우리 부대들이 이러한 성질의 작전을 수행하기는 처음이었다. 강한 참을성이 요구되는 어렵고 특수한 작전이었다. 그러나 절대적 지역방어 책임을 지고 있는 사단으로서는 하루하루가 위험을 내포한 상황이어서 책임감에서 우러나는 단기적 작전계획을 세우려 하는 심정도 이해되었다.

현 단계에서 작전의 중점은 소리를 듣는 청음이라는 인식을 굳게 하여 적의 공사의 진도와 그 앞머리를 잘 판단해야 했다. 사단의 증가된 청음조 배치는 점차 철저해지고 그 보고를 종합해 볼 때 정확성도 향상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발전은 군단 기술 지원반의 판단으로도 입증되었다. 나는 1차적으로 사단의 청음 보고를 신뢰하였다. 군단 참모들에게 빈번한 방문으로 해당지역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깊어지고 있음을 적에게 알리는 일이 없도록 재삼 강조하였다. 적의 지하공사 재개를 보고한 지 2개월이 지나서야 최세인(崔世寅) 1군사령관이 사단지역을 방문했고 작전지대하고는 먼 거리인 한탄강 남쪽 진지 상에서 작전에 관한 보고를 하였다.

참지 못한 사단장이 예측되는 적의 비무장지대 남쪽에서 예상되는 동굴 돌파구 일대를 깨끗이 사계(射界) 청소하였다. 우리의 예측을 벗어나 적이 땅굴공사를 완성해 돌파구를 열고 기습공격을 해올 것에 대한 격파작전을 준비한 것이다. 그것으로 적의 고정간첩이 쉽게 우리의 뜻을 알아낼 수 있었고 적이 거기까지 공사를 진척시켰다면 반대로 땅속의 북한군이 지상에서 하는 우리의 공사 소리를 듣게 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사단장에게 그러한 작업시기가 아직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을 설명하고 과도한 행동을 자제하도록 지시하였다.

 지하공사의 중단

아군 병사가 적의 의심스러운 땅속의 공사음을 탐지하기 시작한 지 14일 만인 1973년 12월 3일에 돌연 그 소리가 중단되었다. 이와 같은 공사의 중단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 지하작업의 특성상 자주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사람에게도 정기적인 휴식이 필요하고 기계장비도 일정한 정비기간이 있어야 하기에 주간 혹은 월간 정비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러나 일주일 이상 공사음이 들리지 않자 혹시 적이 공사 장비와 공법들을 크게 개선하려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한 공사 중단이 1개월이 넘게 되자 우리의 전반적인 탐지작업의 재검토가 요구되었다.

그 이유를 분석해 볼 때, 첫째로는 적이 의심지역에서 아군의 활동이 달라짐을 알아차린 것이 아닌지, 또 그러할 때는 공사를 상당기간 중단하여 아군의 행동을 관찰한 후 차후의 방책을 결정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둘째로는 비무장지대를 관통해야 할 대공사는 단숨에 완공하기가 어렵고, 공사 도중에 예상 외의 큰 사고를 완전히 예방하기도 어렵다. 또한 공법과 장비기계를 대폭 교체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동안 철원의 엄동(嚴冬)은 여전하고 산과 들은 눈으로 덮였다. 그러나 엄동의 지하 온도는 적이 하고자 하는 공사에는 하등의 지장을 주지 않는다. 적이 언젠가 공사를 재개할 것이라는 나의 판단을 제6사단장에게도 강조하고 적정(敵情) 감시를 철저히 하면서 정상업무와 활동을 유지하도록 요망하였다. 그리하여 의심지역의 전술책임 연대도 예정대로 교대하도록 하였다.

나는 이 기간 동안 두 가지의 일을 진행시켰다. 먼저 베트남전의 전우이면서 서부전선의 작전 통제를 하고 있는 미 제1군단장인 홀링스워드(James F. Hollingsworth) 장군을 직접 찾아갔다. 우리 군단이 심혈을 기울이며 찾아내려 하는 지하갱도 공사의 적측 입구를 인공위성 사진으로 찾아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혹시나 북한이 소리 나지 않는 공법(工法)을 외국으로부터 도입하거나 공법을 발전시키지 않았을까 하여 그 가능성을 조사해 보았다. 나름대로의 자립 국방정책을 수행하고 있는 스웨덴은 막대한 국방시설, 동원장비 및 보급품들을 지하에 보관하고 있다. 그러한 국가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세계에서 제일 앞선 지하 굴착기계를 개발 생산하고 있다. 그외 사용하는 동력은 전기이며 소형 지하갱도를 파는 데 사용할 만한 작은 기계와 장비는 생산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적이 소리 나지 않는 공법으로 전환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불원간 종전 공법으로 지하갱도 공사를 재개할 것으로 보고 참을성 있게 감시했다.

나중에 귀순자의 진술로 알게 되었지만, 적이 1973년 말부터 반년 이상이나 공사를 중단하게 된 것은 땅굴의 받침목이 크게 무너져 파놓은 땅굴이 엉망이 되고 인명의 손상도 상당히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파놓은 땅굴을 완전히 수리 보강하고 장비도 개선한 후에 공사를 재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현실로 드러난 적의 땅굴

제6사단의 비무장지대 내 경계병이 적의 지하공사음을 처음으로 청취한 것은 1973년 11월 20일이었다. 그러나 그 수상한 지하음은 14일간 계속되다가 돌연 중단되었다. 그 소리를 다시 찾아낸 것은 약 8개월 후인 1974년 7월 25일이었다.

그 이후 이번에는 전방 비무장지대 내의 청음 초소에서 경계병들이 그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정신과 신경을 곤두세워 근무하였고, 그들의 노고(勞苦)는 무어라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연일 주야의 시간대나 기후와 날씨의 구별 없이 어려운 지형에 배치되어 묵묵히 임무를 다하고 있는 청음 초소 장병들의 노력은 과연 대한민국의 모범적인 군인 상이었다. 그들은 오로지 작전을 성공시켜 나라를 안전하게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불타 있었다.

내가 적 땅굴공사의 진도(進度)를 청음을 중심으로 기술적 분석을 해본 결과 중앙분계선을 넘어온 것이 확실하였다. 우리 쪽 2km의 경계지역 안으로 어디까지 내려왔는지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단지 우리가 적의 땅굴을 역으로 파내려가는 공사를 하기에 적합한 곳까지는 아직 못 내려 왔다고 생각되었다.

청음작전이 여름을 지나 가을에 접어들자 지역의 작전책임을 진 사단장이 초조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사단장은 나의 판단과는 달리 적의 땅굴이 훨씬 남쪽까지 진출해 남방한계선상에 있는 우리 대대 관측소(OP·Observation Post) 밑까지 내려와서 그곳에 남침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는 광장을 파고 있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곳에서 남침 병력을 방출할 여러 개의 출구 갱도를 파서 파괴력을 극대화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기술하였듯이, 이 땅굴작전을 다루는 데는 군단의 일반참모 편성과는 별도로 5~6명의 소수 정예 기술 장교들로 구성된 ‘5·1공사반’을 발족시켜 독립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냉철한 기술적 판단으로 적의 땅굴을 찾는 것이 필수적이었고, 별다른 지식이 없는 다수의 야전형 참모장교들의 주관적 사고는 오히려 정당한 판단을 그르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별도로, 사단과 군단은 그 고유의 참모조직으로 앞으로 발생할지도 모르는 우발사태에 전술적으로 대비하는 것이 효율적 작전 태세라고 판단하였다.

군단과 사단이 묵묵히 적이 파 내려오는 땅굴을 탐색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을 때, 서부의 제1사단 지역에서 특이한 귀순자가 나타났다. 장단반도에서 남침용 땅굴을 설계하던 인민군 기술자인 김부성(金富成)이 1974년 9월에 임진강을 넘어 귀순해 온 것이다. 조사단은 땅굴의 소재를 알아내려고 그를 데리고 여러 차례 정찰해 보았으나 그는 반대방향인 남쪽에서 지형을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비무장지대의 중앙분계선이 한계가 되기도 하여 인민군이 작업하고 있는 땅굴의 위치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귀순자의 진술에서 적이 全 휴전선에 연(連)하여 다수의 남침용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는 신빙성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이 귀순자의 진술은 우리가 하고 있는 철원 땅굴의 실재성(實在性)을 확인해 주는 것으로서 우리의 노력을 더욱 고무시켜 주었다.

그로부터 2개월 후인 1974년 11월 15일 우리는 마침내 서부전선인 연천 부근에서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들어오는 접근로 상에서 실물인 적의 땅굴을 찾아냈다. 비무장지대의 중앙분계선에서 우리 지역으로 1.1km나 남쪽으로 들어온 곳에서 발견하였지만 그 규모가 작고 공법이 열악한 것이었다. 땅에서 너무나 얕게 파 내려오다가 실수로 지표면을 건드려 구멍을 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따스한 공기가 차가운 외기에 접해 수중기가 되어 솟아오르는 것을 우리 경계 순찰조가 수상히 여겨 땅굴을 찾아낸 것이었다. 땅굴의 규모가 작은 것을 보니 대규모 병력의 기습용이라기보다는 무장간첩들의 침투용인 듯했다.

유엔사가 비무장지대의 침범이 확실한 증거물을 제시하면서 판문점에서 그들의 침투공작을 규탄하자, 북한은 흔히 그랬듯이 상투적인 거부 전술로 일관하였다. 북한은 현지 공동 조사하자는 우리의 제의에 반대하면서 오히려 우리의 조작극이라고 강변했다. 이와 같은 실례를 보면서 우리는 더욱 긴장을 하고 적 땅굴 탐색 작전을 강화해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고 굳게 결의하였다.

북한의 위장평화공세

1968년 1월에 북한은 소위 김신조(金新朝) 특공대를 남파해 청와대 기습공격을 기도하였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시해할 암살단을 보낸 것이다. 이어 그들은 동해 원산 앞바다에서 자기네 영해를 침범하였다고 하여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Pueblo號)를 납치했다. 이 두 사건으로 북한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쟁 준비를 갖추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이 그러한 만행을 감행하게 된 동기는 남북 간의 제반 사항을 비교 분석하면서 얻어낸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판단되었다. 이 시기 북한의 국가총생산량(GDP)은 남한을 훨씬 능가해 싼 값으로 제공되는 공산권의 무기체계로 인민군을 현대화할 수 있어서 군사력 야망을 달성하는 데 고무적이었다.

반면 북한이 보는 남한은 미숙한 미국식 민주주의를 모방해 정치적 분쟁으로 민심이 분열되고 질서가 심하게 무너져 국력만 소진하고 패망의 길을 재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내건 경제개발계획이 뿌리를 내리기 어려운 사회구조라고 보고 있었다.
미국도 베트남전을 매듭짓지 못한 종이호랑이(Paper Tiger)에 지나지 않으며 미국 내 반전(反戰)사상이 만연되어 한반도에서 다시 전면전이 일어날 경우 6·25 때처럼 총력을 다하면서 한국 원조에 나서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북한의 사태를 파악한 朴 대통령의 고민은 매우 심각하였다. 그는 이제 겨우 도탄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경제 및 사회개발계획이 성공 가능성을 비치기 시작하였는데, 또다시 국민을 전쟁으로 내몰 수 없다고 결심하였고, 남북이 재격돌하면 우리 민족은 지구에서 영원히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박 대통령의 원숙한 판단을 미국도 깊이 신뢰하였다. 미국은 보잘 것 없는 약소국이 자국(自國)의 정보함을 납치했다는 사실에 매우 분노한 상태였다. 당시 나는 미군과 함께 북한을 보복 공격할 우발계획도 세웠던 합동참모본부의 전략기획국장으로서 판문점의 정전위원회 한국 측 대표를 겸하고 있었다.

이 혼란 속에서 북한이 실제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지 스스로 몸을 던져 확인하고자 판문점 안에 있는 북한 측 중립국감시단 클럽 오찬모임에 나와 안식구를 초대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중립국감시단 체코 대표는 前 국방차관, 폴란드 대표는 前 사관학교 교장이었다. 그들을 통해 유익한 정보를 입수하였고, 특히 북한이 우리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심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부부에게 보여 준 북한 경비병들의 상스러운 대응은 과연 이들이 우리와 같은 민족인가 싶은 비애(悲哀)를 느끼게 하였다.

이러한 사건을 전후하여 북한의 남파 무장간첩들이 침투, 교전한 통계는 별표와 같다. 북한은 무모하게도 태백산에 인민해방기구를 건설하겠다고 울진, 삼척지대로 1개 중대 120명을 상륙 침투시켰다가 우리 군에 완전히 소탕된 일도 있었다.


<표> 연도별 敵 무장간첩 침투 통계

연도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36

307

287

84

56

24

7

2

3

1

우리에게 발견되어 격멸된 인원수와 발각되지 않고 임무를 마치고 돌아간 인원수를 합하면 그 수는 예상을 훨씬 초월한다.

박 대통령은 이렇게 무모하게 도발을 되풀이하는 김일성의 만행이 자칫 전면전으로 확대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고자 용단을 내렸다. 즉, 남북한 간 서로 군사적 도발을 자제하면서 평화적으로 공조하고 발전해 나가기 위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채택한 것이었다. 남북한은 성명의 원칙과 정신을 구체화하여 실천해 나가고자 남북 각각 조절위원회를 설치 운용하고 상호간에 수도를 방문해 그 방안들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1973년에 찾아온 북한의 방문단에게는 서울시청 앞에서 한참 진행 중인 지하철 공사의 현장을 시찰하게 하였다. 그 방문단에는 음흉하게도 땅굴공사를 지휘하고 있던 류장식(柳章植)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중에 확인된 바에 따르면 그는 당내 서열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높으며 대남(對南)사업을 총괄 조정하고, 특히 대남기습공격용 땅굴공사를 지휘하는 자였다.

1973년 말에 제6사단 지역으로 땅굴을 파 내려왔다는 사실은 그 전 해에 이루어진 역사적인 7·4남북공동성명과 대조해 보면 북한의 남북대화와 평화에 대한 진심을 알 수 있다. 땅굴이 1973년 말에 비무장지대의 중앙분계선을 넘어온 것을 역으로 계산해 보면 공사를 착수한 시점은 늦어도 그보다 한 해 전인 1972년 중이며 그 공사를 계획하고 지시한 시점은 1971년 이전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6·25 이후 최초 공식적으로 남북 간의 평화공존을 협의하기 이전부터 남한을 기습 공격하고자 비무장지대에 땅굴을 파내려 왔던 것이다. 7·4남북공동성명을 합의 발표하고 남북 조절위원회의 방문을 상호 교환할 때도 공사 중단은커녕 오히려 그 진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김일성의 위장평화공세의 참모습이었다. 대남(對南)공작을 총괄하다가 후계자가 된 김정일 역시 비무장지대에 땅굴을 파 내려오는 공사에 깊이 관여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또다시 찾아낸 적의 흉계

해를 넘겨 1974년의 여름, 우리 승리군단은 정상적인 임무수행에 여념이 없었다. 즉 전방 방어진지의 철저한 경계와 유사시를 대비한 작전계획 수행을 위한 교육 훈련에 전념하고 있었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한의 본성으로 보아 한반도를 적화 통일하겠다는 야욕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강조했다. 전년도 초겨울에 비무장지대를 지하로 파 내려오던 일을 멈춘 것도 역시 일시적인 중지이지 완전한 포기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경계심을 환기시켰다. 당시 김일성은 우리 후방에 땅굴 등으로 경보병, 특수여단을 침투시키면 그 효력이 핵폭탄의 몇 배가 발휘된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나는 땅굴 굴착음을 탐지한 부근에서 아군의 지나친 경계활동으로 그들이 의심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오랜 대치상태에서 적도 아군의 임무교대 주기(週期)를 짐작하고 있을 듯하여 그들의 지하공사를 알아낸 6사단의 전방 경계부대인 9연대를 예비연대인 7연대와 예정대로 임무를 교대시켰다. 우리 장병들은 여전히 애국심과 책임감으로 충실히 경계근무를 수행하였고, 하나님도 그것을 가상하게 여겨 주셔서인지, 그렇게 어려운 땅 밑의 공사음을 탐지하는 기회를 다시 포착할 수 있었다.

이번에 그 쾌거를 올린 것은 제7연대의 경계 근무병 박헌상 상병과 이상택 이병이었으며, 그것은 적이 지하공사를 중지한 이후 약 8개월 만인 1974년 7월 25일 아침이었다. 그 위치는 9연대가 추적하던 곳과 별 차이가 없었다. 보병 제7연대는 나의 고향인 충북 청주에서 창설되었고 6·25 때는 압록강의 초산까지 진격해 조국의 통일을 목전까지 이룬 부대이다. 16년 전에는 내가 직접 지휘한 연대이기도 했다. 일시적으로 중지했던 인민군의 지하공사 재개(再開) 사실을 탐지한 관계자들은 기쁨을 억누르면서 이번에야말로 김일성 도당의 만행을 반드시 잡아내고 말 것이라는 결의를 굳게 하였다.

며칠간의 청음보고를 종합해 보니 전에 쓰고 있던 일본식 광산 굴착공법 그대로였으며, 그동안 인민무력부는 지하굴착 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했음을 확인하였다. 즉, 암반에 폭약을 소량씩 주입하는 25개 정도의 포약구를 만들어 연속적으로 폭파시켜 한 번에 90cm 정도 전진시키는 것이다. 거기에서 생기는 퇴적물을 갱도차(坑道車)로 밖으로 반출하면서 다음의 폭파준비를 하는 데 4~5시간을 소비하게 되니 하루의 공사 진도는 5~6m로 추산되었다.

음향 탐지된 갱도의 앞머리도 지난 연말의 그곳과 비교하여 그다지 많이 남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북의 굴착기술에 별다른 발전이 없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다만 안타까운 일은 우리가 그 땅속 공사 앞머리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는 장비나 기술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래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충성스러운 우리 장병의 성실한 근무정신이었다.

이번에는 북한이 공사체제를 개선해서인지 하루의 휴식이나 중단 없이 계속 진행되었다. 우리는 적정(敵情) 감시와 청음탐지 그리고 정보 분석을 통해 적에게 조금이라도 뒤지는 일이 없도록 열성을 다했다.

지형과 지질의 특징

제6사단의 현장에서 사령부로 돌아온 이후 나는 제6사단의 전방지대, 특히 적의 지하공사 의심지점 일대를 확대한 지도로 면밀하게 분석해 보느라 밤을 지새우곤 했다.

먼저 지도의 등고선(等高線)을 따라 색칠해 보니 지형상의 특징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의심스러운 지점에서 북쪽에 있는 적의 경계초소(GP)는 우리보다 약간 높은 488m의 고지로서 주변을 감시하고 있다. 거기서 시작하는 밋밋한 능선은 340m인 우리의 경계초소 뒤 남방한계선을 넘어 한탄강으로 내려가서 가라앉는 지형이었다.

단면도를 그려 피아(彼我)의 경계초소를 연결시켜 보니 두 개의 봉우리로 이어져 있었다. 폭이 4km인 비무장지대에서 적 경계초소가 우리보다 약간 높으며 그 후사면(後斜面)은 급경사를 이루어 바로 표고가 200m 정도로 낮은 포양호로 내려간다. 그렇게 북쪽이 낮은 곳을 입구로 하여 땅굴을 남쪽으로 파 내려온다면 굴속의 자연배수에 필요한 경사를 고려해도 쉽게 남방한계선을 넘어 출구를 만들 수 있었다. 한편 적은 지하갱도의 방향유지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했다. 그를 위해 지상에서 보조물로 우리 경계대대 관측소 뒤에 뚜렷이 보이는 큰 바위를 설정할 수 있다. 그들은 경계초소부터 그 큰 바위까지 일직선으로 측량하여 지하공사 방향의 오차를 줄이려 했을 것이다.

나는 군단장실 뒤 작은 방에 땅굴 상황실을 꾸며놓고 혼자 연구와 분석에 골몰하곤 했다. 그곳 지도와 지형의 단면도를 최대로 확대해 보니 의외로 그들 땅이 우리 쪽보다 위치가 낮아서 땅굴 입구를 정하고 직선으로 파 내려오면 한탄강 부근에서 우리의 경계진지 뒤에 출구를 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반대로 그 큰 바위에서 적의 경계초소를 연결하는 선상을 적 지역으로 연장해 보니 그들 땅굴의 공사 입구가 예상되었다. 나는 이러한 도상(圖上)연구로 얻어 낸 지역을 면밀히 연구할 수 있도록 위성사진을 확인하고자 했다. 나는 홀링스워드 미 제1군단장에게 그 위성사진 촬영을 요청하였다. 내 분석의 타당성 여부를 앞으로 얻어질 위성사진으로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왜 비무장지대에 지하갱도를 파 내려오나?

북한의 정책수립 과정을 분석해 보면 일당(一黨)과 일인 독재체제의 결점은 수시로 노출된다. 어떠한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그에 소요되는 비용이나 희생을 무시하는, 그러한 체제를 보완하거나 견제하는 제도가 북한에는 전혀 없다.

김일성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 유지를 위해 국제기구인 유엔이 설정한 폭 4km의 비무장지대를 침범하여 온 세계가 바라는 평화적 질서를 무참히 파괴하려 했다. 우리 군단 지역에서 공사 중인 것으로 보이는 지하갱도는 아무리 분석해 보아도 단순한 소수의 공작요원이나 무장공비의 침투용일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엄격하게 지켜야 할 국제규약을 짓밟더라도 자기의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 북한식 주체사상이다. 혹시 죄악이 발각되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더라도 그것을 도외시하는 것이 그네들의 목적 달성을 위한 가치관이었다.

김일성은 일찍이 6·25 불법 남침에 실패하고서도 인민들에게는 승리한 전쟁이라 호도하고 궁극적인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위해 1962년에 4대 군사노선(注: 북한의 군사정책 기본 방향. 내용은 ‘全 인민의 무장화’, ‘全 국토의 요새화’, ‘全 군의 간부화’, ‘全 장비의 현대화’이다)이 완성되었음을 호언하였다. 이어서 또다시 기습공격을 감행, 남한 전체를 동시에 전장화(戰場化)하여 미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속전속결로 승리한다는 3대 혁명역량 강화전략(注: 북한의 한반도 공산화 전략 방침)을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북한은 어리석게도 250km에 달하는 휴전선에 연하여 여러 개 대부대의 기습공격용 지하갱도를 은밀히 구축하는 것을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침투용 갱도를 이용해 10만에 달하는 유격전 부대를 개전(開戰) 직전에 국군으로 위장, 우리 전방 경계부대 후방으로 침투시킨다면 우리 전선의 방어계획을 완전히 혼란에 빠뜨려 순식간에 돌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한 계획을 시험해 보기 위해 1개 유격소대를 청와대 기습에, 1개 중대를 태백산에 침투시켜 우리 군의 방어태세와 대응능력을 확인해 본 것이었다. 이미 지적했듯이 김일성은 한 개 특수여단이 국군 후방으로 침투할 경우에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후방에 터트리는 핵폭탄과 같을 것이라고 언명했었다.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보니 북한이 무모하게도 정전협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비무장지대를 건너 지하로 파 내려오고 있는 갱도는 규모가 광산용 갱도와 흡사할 것이며 개수는 전방에 배치된 敵 군단마다 2~3개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와 같은 분석과 판단은 단순한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인 추리나 공상이 아니고 20여 년 동안 북한군과 대치하면서 싸워온 나의 경험적 판단에서 도출된 것이었다. 적의 비무장지대 지하공사로 말미암은 여러 상황을 추리해 보니 등에서 식은땀이 날 정도로 아찔했다. 더구나 북한 내에서 철저하게 구축된 일인 독재와 개인숭배 체제하에서는 아무리 수령의 지시가 부당하고 결과가 실패로 결착나도 책임을 지지 않으니 우리의 방어태세는 더 한층 강화되어야 했다.

북한은 우리 군의 경계체제와 임전태세를 오판하고 있다. 우리 군은 항상 북한의 흉계를 탐지할 때마다 즉시 적절한 대응책을 찾아내어 신속히 조치를 해오곤 했다. 6·25전쟁 휴전 이후 자칫 우리 군의 임전태세가 약해지고 국민의 안보의식이 느슨해지려 할 때마다 북한은 실질적으로 무모한 도발을 해서 우리의 경각심을 고양시켰다. 이러한 부질없는 북한의 자충수(自充手)는 우리 국민의 단결을 더욱 촉구하고 국력의 신장을 촉진시켰다. 나는 예하 장병들과 함께 반드시 적의 무모한 흉계를 분쇄할 것을 맹세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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