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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기자의 주장에 대한 반론



등록일   |   2013. 05. 20

2013 년 5월 19일자의 조갑제 기자의 "’대대규모 북한군의 광주개입’ 주장은 믿을 수 없다!”라는 제목의 글에는 반론이 불가피한 첫번째 이유는 이 글은 노골적으로 탈북자들의 발언권을 탄압하는 글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조갑제 기자의 이 글은 2006년도의 한 탈북자의 말을 이렇게 인용함으로써 시작된다.?

<5.18 사태 당시 함경남도에 위치해 있던 우리 부대는 전투동원상태에 진입하라는 참모부의 명령을 받고 완전 무장한 상태에서 신발도 벗지 못한 채 24시간 진지를 차지하고 광주사태에 대해 긴급속보로 전해 들으면서 20여일 이상 출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치부 비 편제 서기로 자주 동원됐던 나는 나중에야 당시 제10군단장이었던 여병남과 7군단 참모장이었던 김두산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개 대대가 광주에 침투했었고 희생도 많았지만 공로가 컸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북한군 특수부대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광주에 특수부대가 침투했었다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로 나돌았다. 특수부대들에서 선발한 최정예 전투원 1개 대대가 해상을 통해 남파됐으며 그중 3분의 2가 희생되고 나머지 인원이 모두 귀대했다는 것이다.>

탈북자들이 한 두 명이 아닌데 조갑제 기자는 늘 이 말만 인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말은 100 퍼센트 정확할 수도 있고 1 퍼센트 틀릴 수도 있다. 만약 이 말의 요지가 광주사태에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는 말이라면 이 말은 백 퍼센트 사실이다. 광주사태에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은1978년 1월 14일 김정일의 지시로 납북된 이래 광주사태 당시 여전히 북한에 있었던 남한 여배우 최은희의 증언이기도 하다.?

몸은 납북되었지만 김정일의 특별 대우로 허심탄회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던 최은희가 “내가 여자지만 가장이고 가르치는 학생이 수백 명인데 어떻게 사람을 무작정 끌고 올 수 있느냐”는 따지자 김정일의 부관은3년 있으면 남조선 해방하고 갈텐데 3년만 기다리라고, 틀림없이 해방된다고 하는 말로 그녀를 달랬다. 그리고 그 말 들은 지 3년째 되는 1980년에 그녀는 북한에서 광주사태 생중계 방송을 듣게 되었는데, "지금 폭도들이 무기고를 부수어 가지고 무기를 들고 서울쪽으로 향하고 있다 “는 뉴스를 유심히 듣고 있다가 훗날 탈출한 후 방송에 출연하여 그 사실을 증언하였다.

지난 5월 15일 종편 채널A의 한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한 탈북자들도 이구동성으로 이 사실을 증언하였다. 광주사태 당시 5월 21일 목포 해안으로 침투하여 23일 광주에 도착하였던 탈북자는 당시 남한에 침투된 공작조의 임무는 무장봉기가 전라도 전 지역과 서울로 확산되게 하고, 서울로 봉기가 확산되는 즉시 북한군이 남침한다는 것이었다. 황석영의 책에도 5월 21일 오전 불과 4시간만에 전남 38개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한 직후 시민군의 첫 작전은 곧바로 서울로 진격하는 것이었음을 그의 책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이날 오전, 처음에는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전주, 서울 방면의 진출을 시도했던 시위대들은 광주-장성 사이의 사남터널 부근에 대기중이던 계엄군에 의해 강력한 제지를 받게 되자 그쪽 방향을 포기하고 주로 전남 도내 각 시, 군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황석영 1985, 211).?

황석영의 책 『광주5월 민중항쟁의 기록』은 운동권 진영에서는 5.18 교과서로서 추앙받는 책이다. 이 책 211쪽에서 황석영은 5월 21일 오전 9시 시위대가 아세아 자동차공업사에서 장갑차와 군용트럭과 지프차 등 수백 대의 차량을 탈취한 본래의 목적은 광주에서 쓰려던 것이 아니라, 먼저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서울로 진격하려는 것이었다고 기록한다. 그것이 5월 21일 오전의 시민군 작전 목표였다. 단지 계엄군에 의해 강력한 제지를 받아 서울로 진격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21일 서울이 아니라 광주에서 먼저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것으로 작전이 수정된 것뿐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수천 정의 총기로 무장한 시위대가 서울로 진격하려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총 들고 서울로 쳐들어가서 무엇 하려 했었던 것인지 우리가 물어보아야 하지 아니하겠는가?

황석영만 시민군 작전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북한이 시민군 작전을 알고 있었으며, 시민군 군용트럭들이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서울 방면으로 진출하던 순간 북한의 모든 방송 매체들은 그 상황을 생중계하고 있었으며, 여배우 최은희도 마음 졸이며 "지금 폭도들이 무기고를 부수어 가지고 무기를 들고 서울쪽으로 향하고 있다 “는 뉴스를 들었다. 종편의 시사방송에 출연한 탈북자들이 그 날 들었다고 하는 뉴스가 바로 그 뉴스이다. 황석영의 책과 최은희 의 증언으로만 어렴풋하게 알려졌던 사실이 탈북자들의 증언으로 이처럼 명확하게 입증되었는데, 도대체 그 진실을 입막음하려는 저의가 무엇인가?

황석영이 기록하고, 최은희가 듣고, 탈북자들이 증언하는 이 사실은 5.18 기록물들과 시민군들의 증언으로 확증되는 사실이다. 윤상원이 “닷새만 기다리면 우리가 이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닷새만 기다리면 봉기가 서울로 확산되어 시민군이 승리한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최은희가 들은 대로 1980년 적화통일을 완성시키려던 북한의 전략도 시민군이 승리하게 하는 것이었다.

시민군의 본래의 전략은 5월 21일 서울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20일 밤 광주역 전투가 그토록 치열하였던 이유도 열차를 확보하려 함이었으며, 시민군이 송정리 비행장 마저 노려 미대사관이 미공군 가족들을 급히 대피시켜야 만 했던 이유도 시민군의 본래 작전이 5월 15일 밤 서울역 회군으로 인해 접수에 실패한 청와대를 접수하려 함이었다. 그 작전이 계엄군의 강력한 제지를 받자 광주교도소 습격과 전남도청 접수 및 전라도 일대로 무장봉기를 먼저 확산시키는 것으로 수정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서울로 진격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한 것이 아니라, 시민군 세력을 키운 다음 다시 진격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이 광주사태 당시 5월 23일부터 광주에서 대남공작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한 탈북군인이 종편 시사프로그램에서 증언한 사실이요, 5.18 기록물들에 그대로 명시되어 있는 사실이다.?

광주사태에 북한 세력의 개입이 있었는가? 이제 그것은 그 누구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이다. 조갑제 기자가 매번 인용하는 2006년도의 한 탈북자의 말도 북한 세력의 개입이 분명 있었음을 강조한 말이라는 점에서는 100 퍼센트 사실이다. 다만, 그 표현에 1 퍼센트의 오류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조갑제 기자가 지난 7년간 꼬집고 또 꼬집는 것이 ’1개 대대’라는 단어이며, 그 탈북자가 ’1개 대대’를 ‘300명’과 동의어로 사용하였다. 조갑제 기자의 주장은‘300명’이라는 숫자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6년에 한 탈북자가 그 증언을 하기 12년 전인 1995년도 검찰보고서에서 먼저‘300명’이란 숫자가 언급되었다:


02:30 경 용산을 출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08:00시경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는 광주공단 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수백명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짚차 등 지휘용 짚차 14대를 탈취당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사병 1명이 실종되고(수일 후 복귀),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09:00시경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백여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 3백여명이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바스 등 차량 56대를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진출하였음 (서울지방검찰청 1995, 92-93).

이처럼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백여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 3백여명 도합 6백여명이 21일 오전 최초로 출현한 시민군이었다고 검찰보고서는 기록한다. 이6백여명이 황석영의 책에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서울로 진격하려 했던 시민군이요, 바로 그 시간 최은희가 북한의 광주사태 생중계 방송에서 듣고 있던 봉기군이다.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5.18 기록물에서도 3백명 단위의 시민군은 자주 등장한다. 그렇다면 2006년 한 탈북자가 3백명이란 표현을 쓴 것이 큰 오류였겠는가?

5.18 기록물이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때를 즈음하여 드러난 사실은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백여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 3백여명 중 광주시민은 극히 적고 대부분 외지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이 외지인들은 어디서 온 누구였는가??

김영택 기자 역시3백여명 배수의 시민군들을 목격하였으며, 광주시민인 그의 결론은 그가 본 시민군들 중 5백 여명은 광주시민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어디서 온 누구였는가??

김동문 기자 역시 광주사태 당시 기자 신분이었다. 그는 나주에서 군복을 입고 시민군과 싸운 기자였다. 그는 나주에서 진도시민군과 영암시민군 표식을 한 수천 명의 시민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 중 진도시민군만 수백 명이었다면 이들은 어디서 온 누구였는가? 진도시민군이 모두 정말 진도 사람들이었는가? 김동문 기자의 나주대첩에서 패배한 그들이 광주로 진격하는데 실패하였을 뿐이지 실제로 그런 외지인 시민군 수가 대대 규모 병력 이상이었으며 김기자는 그런 사실의 명백한 현장 증인이다.?

당시 대동고 교사였던 박행삼은 누가 시키는 대로 5월 21일에 해남에서 시민군 차량 73대에 분승한 시민군을 인솔하여 광주로 진격하고 있었다. 단지 그들도 계엄군의 강력한 제지에 부딪쳐 광주 진입에 실패하였을 뿐이다. 그러면 어디서 갑자기 해남에서 시민군 차량 73대 병력의 시민군이 갑자기 출현하였다는 말인가? 이것은 박행삼 본인도 모르는 일이다. 이처럼 정체불명의 외지인 시민군들이 있었다.?

조갑제 기자에게 천리안이 있었는가? 5월 20일 오전 8시에 갑자기 낫 들고20사 인솔대를 습격하여 지프차 14대를 탈취한 자들이 누구였는지 보았는가? 황석영이 기록하고 최은희가 북한에서 들은 대로 서울로 진격하고 있던 무장시민군들을 보았으며, 그들이 누구였는지 알고 있었는가? 나주에서 김동문 기자가 군복 입고 대치하고 있었던 수천 명의 시민군을 보았는가? 73대의 시민군 차량에 분승하여 광주 진입을 시도하던 해남시민군을 현장 목격하였는가??

외지의 무장세력이 있었다. 윤상원이 투사회보에도 이 외지 무장세력에 대한 기록이 나오며, 그는 외지 무장세력이 능히 무장봉기를 서울로 확산시킬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닷새만 기다리면 우리가 이긴다”라는 말을 시민군 동지들에게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이 외지 무장세력이 누구인지 모른다. 단지 그들 중 광주시민 수는 극히 소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럴진대 조갑제 기자가 인용하는 2006년의 한 탈북자의 말에서 ‘1개 대대’라는 표현에 1 퍼센트의 오류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남한에 침투할 수 있었던 남파공작원들에게 대하여 탈북자들이 말하는 것은 수백 명이 한꺼번에 침투했다는 것이 아니고, 지난 5월 15일 김명국이 증언하였듯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부터 조별로 각기 다른 날자에 침투하였다는 것이며, 그 중 당시 즉각적으로 국군에 발각된 건수만 7건이었다. 당시 신문에 보도되었던 7건의 기사는 그런 사실들의 객관적 물증이다. 그 중 해상침투하다가 발각된 건수들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동시에 남파공작원 침투가 중단되었는가? 탈북자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만약 누군가가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동시에 북한의 남파공작원 침투는 단 한 건도 없었다고 우기면 그의 그런 억지에 오히려 큰 오류가 있는 것일 것이다.

탈북자의 수는 한 명이 아니고 이제는 만 명 단위이다. 탈북자 모두가 남한말에 능숙한 기자는 아니기에 한 두 명은 말의 표현에 1 퍼센트 오류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남한 사람들은 누구나 언제나 1 퍼센트의 오류도 없이 말하는가? 남한 사람들 중에도 누군가는 때로 말에 1 퍼센트 정도의 오류는 있을 것이다. 그럼 아무개 말에 1 퍼센트 오류가 있었다. 그는 남한 사람이다. 조갑제 기자도 남한 사람이다. 따라서 조갑제 기자의 발언권을 제한하여야 한다고 딴 나라 사람이 주장한다면 황당한 주장이 아니겠는가??

그럴진대 우리가 탈북자들의 입장도 헤아려보아야 하지 아니하겠는가? 2006년 한 탈북자의 말에서 1퍼센트 오류가 있었다고 해서 전체 탈북자들의 발언권을 제한하며 방송 출연을 막는다면 이것이 진정 민주주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일 수 있겠는가?

사실, 2006년의 그 탈북자의 말에 1 퍼센트의 오류가 있다고 단정하기는 아직 오류다. 그런 단정을 할 수 있기에 앞서 우리는 황석영의 책 211쪽에서 5월 21일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던 무장단체의 정체가 무엇이며, 어떻게 황석영과 시민군 지도부만 알 수 있었을 그런 정보를 북한이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인지 물어야 하며, 그 날 아침 20사를 습격하여 운전병들 몸에 낫으로 상처를 입히고 지프차 14대를 탈취한 자들이 누구였으며, 그날 진도시민군 완장을 차고 나주군청을 점령한 시민군은 누구였으며, 73대의 시민군 차량에 분승하여 광주로 진격하고 있던 해남시민군은 누구였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런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기 전에는 조갑제 기자의 글에 인용된 탈북자의 증언에 오류가 있다는 주장에 큰 설득력이 없다.?

지금도 이 한가지는 분명하다. ” 5.18사태 당시 함경남도에 위치해 있던 우리 부대는 전투동원상태에 진입하라는 참모부의 명령을 받고 완전 무장한 상태에서 신발도 벗지 못한 채 24시간 진지를 차지하고 광주사태에 대해 긴급속보로 전해 들으면서 20여일 이상 출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등의 말은 조갑제 기자가 거짓말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이다. 언제부터 조 기자에게 북한군 내부 동향을 샅샅이 볼 수 있는 천리안이 있었는가? 기자는 자기에게 그런 천리안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군 복무 경험이 있는 모든 탈북자들이 그때 비상대기하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조 갑제 기자는 당신은 독심술을 가지고 있기에 모든 탈북자들이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조기자의 글은 탈북자들의 발언권 제약 및 억압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언론의 횡포이다. 그런데 조 기자의 독심술만으로는 그런 언론 횡포의 타당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만약 탈북자들이 그들이 북한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바를 증언할 자유조차 탄압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갈망하여 한국을 찾아온 그들을 실망시키는 것이다. 광주사태의 진실은 토론으로 풀어야 할 문제이지, 결코 한쪽의 발언권을 탄압하여 종지부를 찍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닐 것인진대 필자도 이렇듯 오늘은 감히 붓어 평소 늘 존경하던 조갑제 대기자의 글에 반론에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013년 5월 19일 역사학도?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612411385438774&l=c5efc66e34?

http://cafe.daum.net/issue21/3IBb/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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